즈데네크 피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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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즈데네크 피비히는 1850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체코의 작곡가이다. 그는 안토닌 드보르자크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보다 덜 알려졌지만, 체코 민족주의가 부상하던 시대에 활동하며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 교향곡, 실내악 등 다양한 작품을 작곡했다. 피비히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부흥시키고, 피아노곡집 《기분, 인상과 회상》을 통해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으며, 특히 그의 피아노곡 "포엠"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은 체코 민족의 전설과 민요를 소재로 하면서도 독일 낭만파의 기법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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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데네크 피비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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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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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50년 12월 21일 |
출생지 | Všebořice, 체코 |
사망일 | 1900년 10월 15일 |
사망지 | 프라하, 체코 |
직업 | 작곡가 |
음악가 정보 | |
악기 | 오르간 |
장르 | 국민악파 |
직업 |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음악 교사 음악 감독 |
활동 기간 | 1864년 - 1900년 |
2. 생애
즈데네크 피비프는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함께 체코 국민악파를 이끈 작곡가이다. 그는 체코 민족 독립의 기운이 움트는 시대에 활동하며 체코 민요, 민족 무곡의 리듬, 체코 민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등 민족적인 소재를 작품에 많이 활용하였다. 그의 작곡 기법은 독일 낭만파 계열에 속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지향 때문에 체코 국민악파로 분류된다.
피비프는 드보르자크나 야나체크와 달리 유년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배웠고, 음악 수업을 마친 후에도 주로 작곡, 교사, 음악 감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음악계의 요직에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체코 음악계는 스메타나의 진보파와 드보르자크 중심의 프보타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다. 피비프는 음악적으로 스메타나 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스메타나의 정통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다.
2. 1. 탄생과 음악 수업
1850년 12월 21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헤미아 지방의 프셰보지체(Všebořice)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Zdenko였다.[1] 아버지는 체코 귀족 아우어스페르크(Auersperg) 백작을 섬기는 삼림 관리관이었고,[1] 어머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빈 출신 여성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피비히의 음악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1859년부터 1862년까지 헤르만의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에 재학했다. 1859년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1] 1862년부터 1863년까지 김나지움(Gymnasium)에서 교육을 받았다.[1]
1863년부터 1865년까지 프라하의 체코 김나지움에 다녔다. 프란티셰크 체르니(František Černý, 1830-1900)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했다.[1] (피아노 연습곡을 쓴 베토벤의 유명한 제자와는 다른 인물이다.)
1864년 스메타나의 지원으로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에 취임했다. 1864년부터 1865년까지 지크문트 콜레쇼프스키(Zikmund Kolešovský)의 사설 음악학교에 다녔다.[1]
1865년 4월 12일 자신이 지휘하는 자작곡인 첫 번째 가단조 교향곡을 초연했다 (Slavoj 협회 콘서트). 하지만 이 교향곡에는 교향곡 번호와 작품 번호가 부여되지 않았다.[1] 같은 해 라이프치히 국립 음악대학에 입학하여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피아노를, 리히터에게 화성을 배웠다. 또한 야다손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1]
2. 2. 독립과 결혼
1867년 파리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조각과 회화를 공부했다.[1]1870년 만하임에서 마지막 음악 수업을 마치고 체코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야르지메르(Jaroměř) 마을로 이주했다.[1]
1873년 제분소 주인의 딸 루제나 하누쇼바(Růžena Hanušová)와 결혼하고, 그 해 가을 리투아니아의 빌뉴스(Vilnius)에서 합창 지휘자 직을 맡았다.[1]
첫 번째 아내와 사이에는 1874년에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지만, 아들(리하르트(Richard))은 몇 시간 만에 사망했고 딸 엘사(Elsa)도 2년 후 사망했다. 더욱이 아내를 간호하러 온 피비히의 누나가 사망했고, 10월에는 아내마저 사망하는 시련을 겪었다.[1]

2. 3. 재혼과 프라하 복귀
1875년 피비히는 사망한 아내의 소원을 받아들여, 아내의 언니이자 잠정극장의 알토 가수였던 베티 피비호바와 재혼했다.[1] 베티는 당시 스메타나와 피비히 등이 출연했던 잠정극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1] 같은 해, 피비히는 잠정극장(후의 체코 국민극장)의 음악 부감독 겸 합창 지휘자 직에 취임했다.[1]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고, 리하르트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엘사는 세상을 떠났다.[1]1878년 존경하는 스메타나가 잠정극장을 떠나자, 피비히도 잠정극장의 직책을 사임했다.[2] 이는 반(反)스메타나파가 사실상 극장을 지배하게 되어 일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으로 보인다.[2] 이후 정교회 합창 지휘자 직에 취임하여 1881년까지 재직했다.[2] 1891년까지 창작 활동을 했지만, 피비히 자신에 관한 특별히 눈에 띄는 기사는 없다.[2] 평온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
2. 4. 만년과 사망
1891년 어머니를 여의고, 1893년에는 누이를 여의었다. 작곡을 가르친 제자였던 아네슈카 슐조바(Anežka Schulzová)와의 밀접한 관계는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관계는 피비히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슐조바는 피비히의 후기 오페라 대본을 모두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곡집 《기분, 인상과 회상(Moods, Impressions, and Reminiscences)》의 영감이 되는 등 예술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897년 국립극장에서 가까운 프슈트로스 거리로 이사하여 아내와 별거하게 되었다. 1900년 감기에 걸려 10월 15일 49세의 나이로 프라하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그의 뒤를 이어 베티가 사망했다. 피비히의 유해는 현재 비셰흐라드 묘지에 그의 아내(베티)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3. 음악적 특징과 평가
피비히는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함께 체코 국민악파를 이끈 작곡가이다. 그는 체코 민족 독립의 기운이 움트는 시대에 살면서 체코 민요와 민족 무곡의 리듬을 작품에 도입하고, 체코 민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는 등 민족적인 소재를 즐겨 사용했다. 이러한 이유로 작곡 기법 면에서는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체코 국민악파로 분류된다.
피비히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고향 보헤미아에서 양국 문화 교육을 받았으며, 독일어와 체코어에 모두 능통했다. 그의 악기곡은 독일 낭만주의 경향을 띠는데, 초기에는 베버, 멘델스존, 슈만의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1] 초기 오페라와 약 200곡에 달하는 초기 가곡은 독일어로 작곡되었다.[1] 실내악에서는 보헤미아 민요와 둠카 같은 춤 리듬을 사용했다.[1] 그는 체코 민족주의적 색채의 시(''Záboj, Slavoj a Luděk'')를 처음으로 작곡하여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에 영감을 주었으며,[1] A장조 4중주곡에서는 실내악 작품에 폴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1]
1874년 프라하로 돌아온 피비히는 바그너의 오페라 이론을 따랐다는 이유로 프라하 음악계의 심한 반발에 직면했다.[2] 스메타나 역시 바그너 스타일의 음악극을 선보여 어려움을 겪었지만, 피비히의 공격적인 음악 비평과 바그너적인 후기 오페라 『헤디(Hedy)』, 『샤르카』, 『아르쿤의 몰락(Pád Arkuna)』은 스메타나 사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2] 그는 음악 미학자 오타카르 호스틴스키와 함께 프라하 국립극장과 프라하 음악원에서 따돌림을 당해 개인 작곡 스튜디오에 의존해야 했다.[2] 그러나 이 스튜디오는 학생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고, 에마누엘 흐발라, 카렐 코바로비츠, 오타카르 오스트르칠, 즈데네크 네예들리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2]
3. 1. 멜로드라마 부흥
피비히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부흥시킨 주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멜로드라마 작품들은 현재도 국제 멜로드라마 콩쿠르의 과제곡으로 채택되고 있다.[1] 그의 주요 멜로드라마 작품은 다음과 같다.- 《크리스마스의 날》(Op.9)
- 《영원》(Op.14)
- 《보드니크》(Vodník, Op.15)
- 《하콘》(Håkon, Op.30)
- 《여왕 에마》(미완성 작품)
- 《꽃의 복수》(미완성 작품)
3. 2. 《기분, 인상과 회상》
피비히의 피아노곡집 《기분, 인상과 회상(Nálady, Dojmy a Upomínky)》은 총 376곡, 4개의 작품 번호로 나뉘어 발표된 작품이다. 이 곡들은 아네슈카 슐조바와 함께 보낸 나날들을 연애 일기처럼 피아노곡으로 담고 있다. 18세 연하였던 아네슈카는 작곡 제자로서 피비히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적 재능을 살려 피비히의 오페라 《헤디》(Op.43), 《샤르카》(Op.51), 《헬가》(Op.55)의 대본을 작성하기도 했다.[3]《기분, 인상과 회상》은 피비히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창작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조피네 섬의 저녁" (Op.41-139)의 선율은 관현악곡 《황혼》(Op.39)의 중간 부분에 사용되었고, 이후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리크(Jan Kubelík)에 의해 《시곡(Poème)》으로 편곡되어 피비히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아네슈카가 살았던 조피네 섬(슬라브 섬)에는 현재 조피네 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건물 정면 왼쪽 벽에는 이 곡의 선율이 새겨진 피비히 기념 릴리프가 걸려 있다.[3]
4. 주요 작품
즈데네크 피비히는 체코 민요를 바탕으로 한 선율과 체코 민족의 전설(예: 샤르카)을 주제로 한 오페라와 멜로드라마를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구성, 화성법, 관현악법 등은 독일 낭만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피비히의 작품에서는 민요 선율과 민족 무용(후리안트, 폴카 등) 리듬이 들리지만, 초기 작품을 제외하면 드보르자크 등과 같은 소박한 느낌은 거의 없다.
피비히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우아하고 친근한 선율이 풍부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당시 체코에서는 피비히를 포함한 많은 작곡가들이 "체코다운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낭만파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혁신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피비히의 음악은 그 시대에 다소 늦게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레오시 야나체크와 같이 훨씬 혁신적인 작곡가가 모라비아 지방에서 피비히보다 불과 4년 뒤에 태어났다.
슬라브 음악의 특징인 서정성, 체코 민요와 무곡의 리듬 등을 특징으로 하는 체코 음악과, 곡 구성 및 기타 작곡 기법에서 성숙해 있던 독일 낭만파 양식을 융합했다는 점에서, 피비히는 스메타나나 드보르자크가 이루지 못한 부분을 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피비히의 음악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피비히는 멜로드라마 부흥에 공헌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낭독(노래가 아님) + 음악"이라는 독특한 형식에 《크리스마스의 날》 Op.9, 《보드니크》 Op.1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현재도 "국제 멜로드라마 콩쿠르"의 과제곡으로 채택되고 있다.
또한, 뛰어난 피아노 2중주곡 작곡가로서, 자작곡인 관현악을 위한 목가 《황혼》, 교향시 《자보이 슬라보이와 루제크》 등의 피아노 2중주 편곡이나, 피아노 2중주를 위한 소나타·변로장조 등에서는 연주 효과와 적절한 난이도가 훌륭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4. 1. 관현악곡
피비히는 번호가 붙은 교향곡 세 곡 외에도 작품번호가 없는 교향곡을 작곡했다.제목 | 작품 번호 |
---|---|
교향곡 제1번 헤장조 | Op.17 |
교향곡 제2번 변호장조 | Op.38 |
교향곡 제3번 호단조 | Op.53 |
그는 교향시, 서곡, 모음곡 등 다양한 관현악곡도 작곡했다.
- 교향시 《봄》 Op.13
- 희극 서곡 《칼르슈타인의 밤》 Op.26
- 교향시 《자보이, 슬라보이와 루제크》 Op.37[3]
- 관현악을 위한 목가 《황혼》 Op.39[3]
- 교향시 《토마슈와 숲의 요정》 Op.49
- 교향시 《폭풍》 Op.46
- 관현악 모음곡 「시골의 인상」 Op.54
4. 2. 성악곡
-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Op. 21[1]
- 가곡집 「봄의 빛」(春の輝き) Op. 36[1]
- 칸타타 《봄의 로망스》 Op.23[2]
4. 3. 오페라
- Nevěsta messinská|메시나의 신부|메시나의 신부cs Op.18
- Hedy|헤디|헤디cs Op.43
- Šárka|샤르카|샤르카cs Op.51
- Pád Arkuna|아르쿤의 몰락|아르쿤의 몰락cs
- Helga|헬가|헬가cs Op.55 (서곡)
- Toman a lesní panna|달군|달군cs Op.60
- Blaník|브라니크|브라니크cs (미완성)
4. 4. 멜로드라마
피비히는 "낭독(노래가 아님) + 음악"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멜로드라마 부흥에 크게 기여하여, 이 장르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3부작 무대극 《히포다미아》
- * 《펠롭스의 구혼》(Op.31)
- * 《탄탈로스의 속죄》(Op.32)
- * 《히포다미아의 죽음》(Op.33)
- 《크리스마스의 날》(Op.9)
- 《영원》(Op.14)
- 《보드니크(Op.15)
- 《하콘》(Op.30)
- 《여왕 에마》(미완성)
- 《꽃의 복수》(미완성)
이 작품들은 현재도 "국제 멜로드라마 콩쿠르"의 과제곡으로 채택될 정도로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 5. 피아노곡
아네슈카 슐르조바cs(Anežka Schulzová)는 즈데네크 피비히의 작곡 제자로, 18세 연하였다. 그녀는 피비히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비히의 피아노곡집 《기분, 인상과 추억》(Nálady, Dojmy a Upomínky)은 아네슈카와 함께 보낸 나날들이 피아노곡으로 된 연애 일기처럼 적혀 있으며, 총 376곡이 4개의 작품 번호(Op.41, 44, 47, 57)로 나뉘어 발표되었다.[1]《기분, 인상과 추억》에 수록된 "조피네 섬의 저녁"(Op.41-139)의 선율은 관현악을 위한 목가 《황혼》(Op.39)의 중간 부분에 사용되었고, 얀 쿠베리크(Jan Kubelík)에 의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시곡》으로 편곡되는 등 피비히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되었다.[1]
아네슈카는 피비히의 피아노 5중주곡 Op.42의 피아노 4중주 편곡과 피아노곡집 《화가의 작품》의 초고 필사도 남겼다.[1]
피비히의 피아노곡은 다음과 같다.[1]
- 《산에서》(V horách) Op.29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바가텔 모음곡》(Bagatelly) Op.19, 48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황금 시대》(Zlatý věk) Op.22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B♭장조》(Sonáta B dur) Op.28
- 《화가의 작품》(Malířské studie) Op.56
4. 6. 피아노 교본
피비히는 뛰어난 피아노 2중주곡 작곡가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자작곡인 "관현악을 위한 목가 《황혼》", 교향시 《자보이 슬라보이와 루제크》 등의 피아노 2중주 편곡이나, 피아노 2중주를 위한 소나타·변로장조 등에서는 연주 효과와 적절한 난이도가 훌륭한 균형으로 양립하고 있다.4. 7. 실내악곡
피비히는 실내악에서 보헤미아 민요와 둠카(dumka)와 같은 춤 리듬을 사용하였다. 그는 체코 민족주의적 색채의 시(''Záboj, Slavoj a Luděk'')를 처음으로 작곡한 사람이기도 한데, 이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Má vlast)''에 영감을 주었다. 또한, 그의 A장조 4중주곡에서 실내악 작품에 폴카(polka)를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다.피비히의 실내악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비고 |
---|---|
피아노 삼중주곡 가단조 | 유작 |
피아노 사중주곡 마단조 Op.11 | |
피아노 오중주곡 다장조 Op.42 | |
현악사중주곡 제1번 가장조 | 유작, 1874년 |
현악사중주곡 제2번 트장조 Op.8 | 1878년 |
현악사중주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내림나장조 | 유작, 1883년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가단조 Op.27 |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다장조 | 유작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연주회용 폴로네즈 | 유작 |
두 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무언가곡 | 유작 |
5. 참고 문헌
- 후데츠, 블라디미르. 《즈데네크 피비히》. 프라하: SPN, MTZ, 올로모우츠, 1971.
- 후데츠, 블라디미르. 《즈데네크 피비히. 주제별 목록 / 테마틱 베르자이흐니스》. 프라하: 에디티오 배렌라이터, 2002. 850쪽. 체코어, 독일어, 영어로 된 주제별 목록.
- 지라네크, 야로슬라프. 《즈데네크 피비히》. 프라하: 스탓니 후데브니 비다바텔스트비, 1963.
- 록, 브라이언 S. 《프라하의 오페라와 이데올로기: 국립극장의 논쟁과 실제, 1900~1938》. 뉴욕주 로체스터: 보이델 & 브루어, 2006.
참조
[1]
서적
Child Composers and Their Works: A Historical Survey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21-03-04
[2]
서적
The Penguin Companion to Classical Music
https://books.google[...]
Penguin UK
2021-03-04
[3]
웹사이트
Poème
https://en.schott-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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